질문 18. [이벤트 1]
가장 두려운 게 무엇인가요?
⇝ 벌레
entomophobia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리 여섯개 이상인 생물체를 극도로 무서워한다.
그나마 파리류는 기겁하지 않을 정도?
원래 지금 내 포지션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자리였는데 적도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바퀴벌레의 성지라.. 지원하면서 반드시 싱가포르에서 일해야 하는 거면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.
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입사 후 3주를 싱가포르에서 교육 받았는데..
가운데 손가락 크기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브라운 칼라의 바퀴벌레가 샤워실에서 아침 저녁으로 나오면서 공포의 3주를 보냈다. 출장 끝나고 귀국한 날 내 침대에 쓰러져 18시간 연속으로 잤던 기억이..
작년말 뉴질랜드에서 창문을 열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
'딱'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까만 게 내 허벅지 위로 떨어지는 걸 봤다.
느낌이 딱 벌레인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라 바로 멈추지 못하고 조금씩 속도를 줄여 갓길에 세우고 보니 엄청나게 큰 말벌 같은 게 죽어서 내 다리 위로 떨어진 거다.(빠르게 달리는 차체에 부딪히고 창문 안쪽으로 떨어짐.) 꺅 하면서 옆에 있던 종이로 쓸어내려 바닥으로 떨어뜨렸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더 무서워졌다. 그냥 기절한 거면 어쩌지 하면서 며칠을 벌레(시체)와 함께 드라이브를 해야 했다.
고속 주행 중 벌레가 차 안으로 들어오면 난 사고 나서 죽겠구나 싶었다.
⇝ 불
어렸을 때부터 불을 정말 무서워했다.
초등학교 2학년쯤 The Towering Inferno(타워링) 영화를 본 게 계기가 아닐까 추측해본다.
고층 빌딩에 화재가 발생하는 재난영화로 1970년대 작품이다. 당시에는 몰랐는데 불에 타 죽는 장면이 엄청나게 충격이었던 것 같다.
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면 지하는 가지 않으려고 했고(여차하면 창문 깨고 도망치려고)
집을 구할 때도 비상탈출구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뛰어내렸을 때 죽지 않을 저층을 선호한다.
신기한 건.. 귀신은 무서워하는 사람한테 보인다고 했던가.
꼭 벌레를 목격하는 건 나고(그 뒤로 싱가포르 출장을 수없이 갔는데 바퀴벌레를 목격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)
실제 화재 현상에서 피신한 적도 두 번 있다.
한 번은 회사 사무실 지하 중국집에서 불이 나 그 뒤로 이틀을 출근하지 못했었다.
다같이 2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갔는데 연기가 나고 냄새가 나서 겁이 났었다.
큰 불은 아니었지만 45층짜리 건물 전체에 퍼진 연기를 빼느라 빌딩 출입이 이틀 금지됐었다.
그리고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내가 사는 오피스텔 같은 층에서 불이 났다.
새벽 2-3시쯤 자다가 문득 깼는데 복도에서 아주 약한 목소리로 "살려주세요.. 살려주세요.."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. 순간 몸이 굳고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는데
무슨 소린지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 살금살금 현관 문 쪽으로 가보니 연기 냄새가 났다.
얼른 외투를 걸치고 핸드폰 챙기고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열었더니 온 복도에 연기가 자욱해 몸을 숙이고 계단을 찾아 1층까지 내려가 빌딩을 빠져나왔다.
소방차가 오고 한 명이 실려나오고 무서워서 택시 타고 부모님 집으로 가서 잤다.
그 뒤로도 일주일 정도 부모님 집에서 지내고 오피스텔에 다시 가보니 그 잠깐에도 재가 가득 쌓여 모든 표면을 닦고, 그릇 등을 다 씻어야 했다는..
⇝ 아무 의미가 없을까봐..
'가장 두려운 게 무엇인가요' 질문의 의도는 사실 벌레, 불 같은 tangible한 게 아닌, 추상적인 거다.
내가 가장 두려운 건 아마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,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것..
이런 종류의 두려움이다.
한 마디로 내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을까 두렵다.
그래서 나도 모르게 회사를 고를 때도 그 회사의 사명(mission)과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우선순위에 두는 게 아닐까.
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좋아하는 quote가 있다.
우르크 소녀 파티마를 구하고 학교 등록금을 지원하기로 한 강모연에게 유시진이 말한다. "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다 책임질 수는 없어요.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…" 이에 강모연이 한 말.. "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뀌겠죠. 그리고 그건, 파티마에겐 세상이 바뀌는 일일 거예요."
No comments:
Post a Comment